시간이 멈춘듯한 세화마을에 대해 소개해보려한다.
반짝이는 바람과 함께, 세화에 닿다
제주의 동쪽, 성산일출봉에서 차로 20분 정도를 더 달리면 세화마을에 도착한다.
사실 제주를 여러 번 여행한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세화’를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이곳은 조용하고, 겸손하다.
하지만, 한 번 마음을 열고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 보면,
이곳은 유난히 따뜻하고 부드러운 제주가 살아 숨 쉬는 공간이라는 걸 알게 된다.
세화마을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자연스럽게 차를 세우고 걷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짠내보다 햇살에 씻긴 듯한 맑은 바람이었고,
길은 좁았지만 넉넉했다.
오래된 돌담과 키 작은 집들, 그리고 낮게 열린 대문 사이로 고양이 한 마리가 느긋하게 몸을 늘이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문득 이렇게 생각했다.
“이곳에선 시간이 조금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아.”
관광지의 북적임이나 유명한 포토존 대신,
세화에는 일상의 조각들이 있다.
빨랫줄에 걸린 수건, 주말마다 열리는 작은 플리마켓,
그리고 아침마다 문을 여는 오래된 식당.
누군가의 하루가, 그대로 풍경이 되어 나를 반겼다.
골목, 골목 그리고 사람들
세화마을의 진짜 매력은 작은 골목 속에 숨어 있다.
어디에도 특별한 조형물은 없지만,
돌담 위에 핀 선인장 꽃, 낮잠 자는 강아지, 고요히 열려 있는 창문 하나하나가
이 마을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했다.
나는 무작정 아무 골목이나 들어가 보기로 했다.
작은 카페가 하나 눈에 띄었는데, 간판도 없고 외관도 아주 소박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가 책을 읽고 있다가
내게 따뜻한 웃음을 건넨다.
“귤차 드릴까요?”
한 마디에 마음이 풀렸다.
창밖으로 보이는 바다와 바람, 그리고 차향이 어우러지며
세화의 시간은 천천히 나에게 스며들었다.
골목을 따라 걷다 보니, 나처럼 혼자 여행 온 이들이 보인다.
서로 말을 섞진 않지만, 같은 공기를 느끼고 같은 바다를 바라본다는 묘한 동질감.
세화는 그런 곳이다.
"우리는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공간에 함께 있는 거야" 라는 느낌.
세화 오일장 근처에는 작은 공방도 몇 군데 있다.
도자기를 빚는 청년, 제주 감귤로 천연 잼을 만드는 부부,
그리고 바닷가 유리 조각으로 액세서리를 만드는 작가들.
그들은 관광객을 위한 콘텐츠가 아니라,
그저 자신의 생활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 모습이 더 진짜 같았고, 그래서 더 매력적이었다.
해가 기울고, 마음이 눕는 곳
세화마을은 해질녘이 특히 아름답다.
서쪽 바다에 비해 더 조용하게 물드는 동쪽의 노을은,
마치 하루를 정리하는 일기장처럼 차분하고 섬세하다.
푸르던 하늘은 주황빛으로 물들고,
바닷바람도 살짝 차가워지며 하루의 끝을 알린다.
나는 바닷가 돌담에 앉아 노을을 바라보았다.
그 옆에서는 여행을 마친 듯한 한 가족이 조용히 사진을 찍고 있었고,
멀리서 자전거를 탄 아이가 바람을 가르며 지나갔다.
이 장면 모두가, 하나의 그림 같은 기억으로 남았다.
그날 밤, 세화에 있는 작은 숙소에 머물렀다.
창문 너머로 파도 소리가 귓가를 두드리고,
바람은 커튼 사이로 스며들었다.
이 도시에는 특별한 조명이 없지만,
별빛과 마음의 여백이 있었다.
세화는 “볼거리 많은 여행지”는 아니지만,
“내가 잠시 머물기 딱 좋은 곳”이다.
사람들의 속도보다 느린 이 마을에서
나는 비로소 내 속도대로 숨을 쉬며 하루를 보냈다.
‘세화마을’은 지도에 크게 표시되지 않는다.
하지만 마음속 지도에는 아주 크게 남는다.
시간이 멈춘 듯한 골목과, 바다 냄새가 스며든 하루,
그리고 말없이 따뜻했던 사람들.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세화는
잠시 쉬어가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조용한 친구 같다.
다음에도 내가 지쳤을 때,
나는 아마 다시 이 마을을 찾을 것이다.